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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머징 워십의 실제

최고관리자 2019-06-29 (토) 19:28 4년전 3395  

                                                     이머징 워십의 실제

                                                                                                                                              박 종 환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예배학)

 

   

모더니즘 시대 그 이후

 

이데올로기의 옳고 그름과 같은 거대담론을 논했던 모더니즘 시대가 가고 20세기 후반에 밀어닥친 서구의 탈근대주의는 예술장르에서부터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이성중심, 이데올로기 중심, 백인중심, 유럽중심, 권위주의, 남성중심의 문화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는 곧 중심과 주변의 해체를 의미하며 중심이 없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대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구의 예배학에서는 전통과 현대성에 대한 편식과 함께 예전적 전통과 정통성(Authencitity)을 중요시하는 교단과 성령의 즉흥적 경험을 중요시하는 자유교회(Free Church)또는 오순절 교단사이의 갈등, 즉 전통성과 즉흥성의 갈등과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기독교 전통이 갖는 권위적 이미지에 대한 거절이고, 정통성에 대한 재고찰의 필요성으로 등장한다. 전통과 권위에 대한 거부로 미국교회는 대중문화에 대한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 구도자 예배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전통적 예배와 구도자 예배 또는 열린 예배가 가장 중요한 면에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통적 예배가 - 특별히 개혁주의 전통에 서있는 말씀을 중시하는 개혁자들의 정신에 충실한 나머지 지나치게 설교 중심의 예배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구도자 예배도 예배의 정점에 설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설교전의 찬양과 기도, 드라마, performance 등은 설교에서 답이 주어질 질문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는 예배의 중심이 설교로, 나아가 그 설교를 하는 사람에게로 이동하게 하는 견인차를 담당한다. 결국 전통과 역사적 매개를 제외시키며 대중과의 문턱을 낮추고자 원하는 구도자 예배에서 설교자라는 우리에게 보이고 들리는 매개를 스타로 탄생시킬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의 구조는 현대 한국교회와 북미 교회에서 대형교회 (Mega Church) 가 탄생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해체되고 파편화되며, 절대적 진리나 권위가 상실되고, 세대 간의 갈등이 현저히 드러나고 있는 탈근대주의 사회에서 오늘날 교회의 예배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편식과 더불어 권위를 거절하는 가운데 새로운 대중적 지지에 기반을 둔 비권위적 권위가 나타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쉽게 이야기하는 소위 열린 예배가 한국교회의 양적성장, 특히 젊은 세대의 전도에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소위 경배와 찬양으로 대표되는 예배 유형이 80년대부터 한국교회를 휩쓸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예배형태가 지나치게 대중화되고 획일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어떤 음악적 장르의 문제를 넘어서서 인간에게 있는 다양한 취향과 성격, 인성, 지성이 예배 안에서 지극히 제한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하워드 가드너 (Howard Gardner) 의 주장처럼 인간은 언어, 음악성, 공간 감각, 예술성, 내면성, 외향성과 같은 다양한 지적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다양한 지적 능력이 하나의 예배형태 안에서 획일화 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다양성보다 획일성을 강조하는 지적 능력은 획일적인 대중적 전통을 창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머징 처치와 이머징 워십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획일화된 예배형태가 가져온 여러가지 신학적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되어야하고 다음세대의 예배와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찰하면서 논의되어야한다. 만약 교회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그리고 그 저변에 존재하는 신학에 대한 깊은 통찰이 없이 이머징 위십과 처치를 논의하는 것은 이를 마치 유행처럼 지나가는 하나의 교회문화운동으로 여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실제로 이머징 워십을 소개하는 한 공개강의에서 이를 하나의 새롭고 신기한 교회문화의 형태로 논의하며 마치 기독교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의 관심과 호기심에서 한국교회의 근본적 문제중 하나인 신학적 뿌리없는 유행에 집착하는 위기를 필자는 볼 수있었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씀처럼 교회와 예배의 역사는 늘 반복적인 성격을 가져왔다. 오늘날 이머징 교회와 이머징 워십운동은 80년대 이후의 대중적 기독교에 대한 반성이고 반작용이며 이는 보다 깊은 초대교회의 영성과 예배의 신비로의 회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머징 위십과 처치의 구체적 특징과 요소를 언급하기에 앞서 예배학자로서 이머징 워십과 다감각적 예배(Multisensory Worship)에 대한 신학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body)의 소중함을 발견하다

 

첫 번째로 생각해야할 점은 현대는 예배에 있어서 언어 중심적인 예배보다는 다양한 감각의 갈증을 해소하는 예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예배자들이 갖추어야할 영적이고 경험적이고 다양한 감각을 만져주는 예배의 차원에 대한 필요성을 논의하기에 앞서 몸에 대한 이해를 돕는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탈근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특별히 인문학 분야에서 인간의 몸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근대주의는 머리가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몸과 머리의 균형이 깨어진 인간이해를 기점으로 하였다면, 탈근대주의는 인간에게 머리뿐 아니라 다른 기관이 있다는 깨달음을 갖게 하였다. 몸의 각각의 부분이 소중하며 이성이 아닌, 당위가 아닌, 몸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이는 소위 프랑스 철학자들이 말하는 작은 소리를 듣는것(Listening small voices) - 그동안 억압되 왔던 존재들로 예를 들어, 어린이, 여성, 외국인, 소수민족, 유색인, 인간의 몸 등 –�과도 연결되고 있다.

 

둘째로 다루어야할 부분은 기독교의 신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몸의 부정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이다. 그리스 철학에 바탕을 둔 서구 형이상학은 기독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특히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이 인간의 육체 안에 갇혀있는 노예와도 같다고 주장하며 영혼이 육체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고 자유라고 가르친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는 기독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것이 사실이다. 이는 신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입장, 나아가 육체가 이성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기독교는 이천년 역사에서 인간의 몸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해왔기에 필자는 기독교 신학이 풀어야할 하나의 큰 숙제가 바로 인간의 몸과의 화해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몸과 관련된 개인적인 체험을 나누고자한다. 언젠가 미국 신학교의 예배학 과목 조교를 한 적이 있었다. 교수가 수업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학교 채플로 데리고 가서 자신이 원하는 아무 곳에 가서 자기 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고 요구했다. 몸을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라는 말에 구석 구석에서 소릴 지르는 사람, 몸을 비틀고 이상한 동작을 하는 사람, 뛰어다니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등 가지각색의 행동들이 나왔다. 이들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행동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들 속에서 의미 없이 손동작 하나 올리지 못하고 너무 자유롭지 않은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몸이 늘 뻣뻣하게 굳어있는 가운데 무언가를 사색하는 듯한 표정과 몸짓을 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사실은 내가 살면서 취하는 몸동작이 몇 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몸이 철저히 의식의 노예가 된 것이다. 몸의 요구에 자연스럽게 반응한다는 것은 몸에 대한 긍정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필자는 예배학을 통하여 몸의 소중함에 대해 신학적으로 사유기 시작한 것이다.

 

기독교적 감성 -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다가서는 통로

 

신학에서 몸에 대한 논의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이미 5세기에 칼케돈회의 (The Council of Chalcedon)에서 예수의 인성과 신성의 문제를 논하며 예수를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신(Fully Human, Fully Divine)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육체성과 신성에 균열이 없다는 의미인 동시에 그리스도는 그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세상과 사람들을 이해하고 보고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몰트만은 이를 케노시스(kenosis)로 설명한다. 케노시스는 하나님이 자신을 완전히 비워 인간의 몸을 입고(incarnation.육화, 성육신) 이 땅에 오셔서 상처받기 쉬운 상태(vulnerability)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최대의 신비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상처받기 쉬운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고 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인간의 고통을 체휼하고 이를 통해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몰트만은 예수의 육체성을 단순히 체휼과 고통의 통로로만 이해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배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예배가 어떻게 인간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와 연결될 수 있는지를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을 호흡하고 보고 만지고 느끼고 경험하신 것이다. 그 세상은 죄로 경도된 세상이었으나 동시에 하나님이 창조한 보기에 좋은 세상이었다. 이제 인간이 거룩해진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처럼, 감각과 육체에 대한 긍정을 동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분이 말하는 것처럼 말하고, 그분이 느끼는 것처럼 느끼고, 그분이 만지는 것처럼 만지고, 그분이 보는 것처럼 세상을 보고, 그분이 듣는 것처럼 사람들의 말과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을 통해, 다시 말해 그분을 닮는 가운데(Imitatio Christi) 인간의 성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신학적 당위가 아니라 예배가운데 실제로 일어나는 경험적 현상들이다.

 

그러면 이러한 현상들이 예배가운데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살펴보자. 예배의 고전적 정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인간이 성화에 이르는것 (The Glorification of God and the Sanctification of Humanity)이다. 하나님의 영화로움을 바라보며 그분을 경배할 때 인간의 성화와 거룩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이 가운데 우리의 몸과 감각을 통해서도 예배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비는 언어화 이성화되지 않는 부분이 더 크기에 언어화되지 않은(non-verbal) 차원에 열려있어야 영육을 통전적으로 포함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비언어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 하나님의 신비를 미적이고 종말론적으로 예배에서 경험하는 것에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안적 예배 (alternative worship)의 필요성

 

예배학자인 돈 셀리어스(Don Saliers) 교수는 예배는 인간을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인도하고 종말의 시간을 현실속에 가져옴에 있어서 모든 예술적 장르를 요구한다고 한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 인간경험의 모든 영역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 드려지는 음악을 듣거나 부르는 가운데 사람들이 아름다운 음악 자체가 되는 것이고,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Meta Narrative)가 우리의 삶의 이야기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우리가 성찬을 통해 빵을 나누고 몸에 영양을 얻고 이를 통해 타인을 위한 빵이 되도록 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예배의 신비이다. 이 신비는 인간의 육체성을 통해 예배자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웃의 고통을 인식하게 되는 신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배는 종말론적 프락시스이고 예배가운데 사람들은 그들의 감각과 육체를 통해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고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 신비는 나의 영혼 안에서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이웃이 함께 드러나고 인식되는 공동체적 신비이다. 예배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들 - 찬양, 성경봉독, 설교, 기도, 성찬, 세례 은 종말론적 징표이고 종말론적 예술이다. 이러한 행위들 안에서 예배는 인간의 감정과 지성, 의지의 모든 측면을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술이나 예전적 행위는 신학이 이성적 범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로 우리를 인도하며, 은유적이고 상징적 행위들은 우리 인식의 경계선과 이 세상의 상식 너머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예배에서 사용되는 일상적 사물들과 움직임 빵과 포도주, 세례의 물, 기름, 안수하는 손, 성전의 향기, 목소리의 울림, 멜로디, 배너를 비롯한 여러 비주얼들 은 하나님의 신비를 조금 더 가까이 느끼고 만질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예배의 상징과 상상력, 예술성, 비언어적 요소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통해 필자는 이러한 신학적 내용들을 담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예배의 모델과 유형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예배 모형은 전통적 혹은 현대적이라는 단순한 범주화에 대한 논쟁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며 돈 킴벨(Don Kimball) 이 그의 저서 Emerging Worship Emerging Church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의 목적과 예배의 뿌리에 대한 근본적 재고찰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대안적 예배 모형을 필요로 한다면 그 예배가 갖는 중요한 기준들은 무엇이어야 할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그러한 예배는 성도들의 참여를 유도하며 그것에 큰 가치를 두는 예배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다는 감격과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인간을 변화시킨다는 믿음과 기대감이 충만한 예배일 것이다. 그 기대감은 참여자들의 감각과 지성, 영성이 변화의 주체가 되는 거룩한 분과 연결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참여자들을 수동적 관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 적극적인 하나님의 신비에 동참하도록 유도하게 될 것이다. 이 신비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새로운 확신과 믿음으로 유도되어지고, 인도자와 참여자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벽인 제 4의 벽(The 4th wall)을 침투하는 어떤 행위와 힘이 전체의 공간 안에 가득 차게 되는 그러한 예배이어야 한다.

 

예배의 전체적 요소가 하나의 몸처럼 각각의 기관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서로의 존재를 보완하고 지지하는 것이 유기적 예배라고 할 때 돈 킴벨이 말하는 이머징 워십(Emerging Worship) 은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머징 워십은 찬양과 설교로 구성된 예배 형식으로부터 여러 차원과 표현으로 구성된 보다 다감각적인 접근을 필요로 한다. 수동적인 관람이 아니라 보다 참여적인 모임의 디자인을 하면서 시각물을 사용하고 교회력의 사용, 교회력에 따른 색깔 등, 초기 교회의 예전적 요소를 수용하며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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